이번에는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라파엘 전파가 추구했던 그림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존 에버렛 밀레이(Jonn Evereft Milais, 1829-1896)는 친구들과 함께 당시 공식을 따르는 아카데믹한 화풍에서 벗어나 라파엘로가 태어나기 이전의 예술로 돌아가자는 의미에서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s)라는 모임을 결성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그대로의 자연을 그리면서 학교에서는 금기시되었던 색(청록, 자주, 보라색 등)도 마음껏 활용하였으며, ‘PRB’(Pre-Raphaelite Brotherhood)라는 서명을 사용했습니다. <오필리아>는 고전 중의 고전인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연극 <햄릿 Hamlet>의 4막 7장에서 주제를 가져왔으며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기에 라파엘 전파가 추구한 화풍을 잘 보여주는 걸작입니다.
<햄릿>에 등장하는 오필리아(Ophelia)는 햄릿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사실을 알게 되자 미쳐 버립니다. 덴마크의 강가에서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매일 노래를 부르며 꽃을 따서 화관만 만들던 오필리아는 꽃을 따기 위해 몸을 숙이다가 물에 빠지게 됩니다. 강물에 떠내려 가면서도 계속 노래를 부르다 서서히 물속으로 가라앉아 죽어 갑니다.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밀레이는 1851년 7월 런던 근처인 서리(Surrey)의 호그스밀(Hogsmil) 강가로 갔습니다. 그림 속의 인물보다 먼저 그림의 배경인 꽃과 강물을 먼저 그린 것이지요. 그는 작은 삼각 이젤에서 5개월 동안 일주일에 6일, 하루에 11시간씩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바람이 불고 눈이 오는 11월이 되어도 밀레이는 강가를 떠나지 않고 움막에서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당시 야외에서 스케치를 한 후 스튜디오에 가져와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라파엘 전파는 야외에서 그림을 완성했던 것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그려진 그림 속의 꽃의 이미지를 검색엔진에 넣어 검색해 보면 실제로 그 꽃이 검색 결과로 나올 정도로 정교하게 그렸습니다. 또한 꽃들이 피는 시기가 다른데도 세부적인 부분까지 섬세하게 그린 것은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투자했는지 알려줍니다.
그림 속의 식물이나 꽃들은 모두 나름의 상징이 있습니다. 밀레이 당시 영국 빅토리아 왕조시대에는 꽃말이 상당히 유행해 오필리아의 몸에 꽃을 배치하여 그녀의 처절한 상황과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필리아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수양버들은 버림받은 사랑을, 버드나무 가지 주변에 자라고 있는 녹색의 쐐기풀은 고통을, 목에 걸려 있는 제비꽃은 육체적 순결과 젊은 날의 죽음을, 오른손 주변에 떠 있는 붉은 양귀비는 깊은 잠과 죽음을, 흰 데이지는 순결을, 노란 팬지는 공허한 사랑을, 작고 붉은 복수초는 슬픔을, 뺨 옆에 있는 장미는 오필리아의 오빠 레이어스가 동생을 '5월의 장미'라고 부르던 것을 뜻합니다. 또한 그림 오른쪽 덤불 속에 움푹 팬 구멍 세 개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의 형상을 연상케 합니다.
그림 속 꽃들은 <햄릿>에 묘사된 꽃들이지만 오필리아의 손에 들려진 빨간 양귀비는 예외입니다. 밀레이는 잠과 죽음을 상징하는 꽃을 의도적으로 그려넣은 것입니다.
야외 스케치를 끝낸 후, 밀레이는 런던 작업실로 돌아와 오필리아를 그리는 데 착수했습니다. 오필리아의 모델은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 Siddal)이었습니다. 당시 19세의 모자가게 점원이었던 엘리자베스는 아름다운 외모로 화가들의 사랑을 받던 인기 모델이었습니다. 밀레이는 모델로 하여금 드레스를 입고 물을 가득 채운 욕조 안에 들어가 누워있는 포즈를 취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모델은 4개월 동안 욕조에 누워 있어야 했기에 물을 따뜻하게 데우기 위해 기름 램프를 사용했습니다. 하루는 기름 램프가 껴져 있어 시달은 물이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화가를 방해하지 않을 만큼 프로 정신이 강했습니다. 결국 지독한 감기에 걸리자 그녀의 아버지가 병원비를 청구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오필리아의 모델이었던 엘리자베스 시달은 1860년 라파엘 전파의 일원인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로세티의 계속된 외도로 우울증에 시달린 그녀는 아이를 사산하고 아편중독자가 되고, 결국 33세에 아편을 먹고 자살했습니다. 밀레니는 자신이 그린 양귀비가 모델이었던 시달의 운명이 될 줄을 짐작이나 했을까요?
1852년 처음으로 이 작품이 왕립 아카데미에서 전시되었을 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화가들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내려온 정형화된 아름다움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 작품은 그 아름다움과 자연에 대한 정확한 묘사로 인해 찬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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