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현주의의 창시자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The Sc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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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이야기

표현주의의 창시자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The Scream>

by 다시채 2024. 11. 29.

  저녁의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해골 같은 사람이 귀를 틀어막고 비명을 지르는 모습의 그림.... 이 정도만 언급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이 있을 것입니다. 광고, 만화, 이모티콘 등 다양한 매체에서 사용되거나 패러디되고 있는 그림이 뭉크의 <절규> 입니다. 이 그림을 보다 자세하게 살펴볼까요?


   <절규>는 노르웨이가 자랑스러워하는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대표작이자 가장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는 색채의 대비, 곡선과 직선, 단순화시켜 변형한 인체 등을 통해 복잡한 내면의 감정을 묘사하여 미술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크는 인간 내면의 비애와 고통, 두려움 등의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정서를 숨김없이 표출하였기에 표현주의 창시자로 불립니다. <절규>는 뭉크 본인이 내지른 비명과도 같은 작품이며, 뭉크 자신의 삶과 작품을 요약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뭉크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명망 있는 지식인 가문에서 자란 군의관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지적이고 예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뭉크가 5세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아버지는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에 광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아버지는 학대와 폭력을 일삼고 가난까지 물려줍니다. 뭉크가 기댈 곳은 자신을 돌보던 이모와 누나 소피 밖에 없었는데요. 1877년 뭉크가 14살 때 믿고 따르던 누나마저 어머니와 같은 병인 결핵으로 죽습니다.

 

  뭉크는 어린 나이에 만성 천식, 류머티즘, 불면증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기에 학교를 자주 쉬어야 했습니다. 뭉크는 어머니와 누나처럼 자신도 일찍 죽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이러한 뭉크에게 유일한 위안은 그림이었습니다.  뭉크는 질병과 불안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남겼습니다. 뭉크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내부와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림에 담고자 했습니다. 

 

 

뭉크의 대표작품인 &lt;절규&gt;를 볼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
< 절규 > 1893년, 파스텔 , 91x73.5cm, 오슬로 국립미술관

 

  뭉크는 <절규>라는 작품을 그리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어느 날 해질 무렵 2명의 친구와 산책하고 있었다길 한쪽에는 마을이 다른 한쪽에는 깊은 협곡이 있었는데나는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며 현기증을 느껴 난간에 몸을 기댔다구름이 핏빛으로 물들었고공포에 질린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친구들은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고나만 이 두려움에 떨며 홀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그때 나는 대자연을 관통하는 강력하고 무한한 절규를 들었다.

 

  <절규>는 뭉크가 오슬로의 에케베르크(Ekeberg)에서 느낀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원래의 제목은 <자연의 절규>입니다. 그림속의 인물은 유령처럼 느껴지는 기괴한 모습입니다. 머리카락은 고사하고 눈, , 입의 윤곽을 찾아보기 얼굴이지만 공포에 질린 표정은 아주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기다란 두 손이 얼굴 양쪽을 감싼 모습은 청각적인 효과도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온통 핏빛으로 물든 하늘과 이와 대조를 이루는 검푸른 강물, 동요하는 감정을 따라 굽이치는 곡선과 날카로운 직선의 병치, 극도의 불안감으로 온몸을 떠는 한 남성의 절규는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과 고통에 대한 울부짖음을 입 밖으로 표출시키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에 담긴 구불구불한 선은 그의 심적 상태를 외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절규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은 갈기갈기 찢긴 그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림의 왼쪽에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고요하고 차분한 듯한 인상을 풍겨 주인공이 느끼고 있는 두렵고 고독한 정서를 강하게 대조시킵니다. 이런 주인공의 모습은 뭉크 자신의 마음속 상처에서 나오는 자신이었습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글 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추천합니다.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과정에서 정체를 알 수 없던 공포와 슬픔의 감정들이 구체화되고 객관 화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던 감정들이 자신의 손을 거쳐 눈에 보이는 대상으로 형상화되면, 그것은 예전보다는 조금 더 견딜만한 것이 되곤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던 뭉크는 본능적으로 이런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뭉크는 비슷한 작품을 많이 그린 화가로 유명합니다. 자신의 작품을 무척 아낀 나머지 작품이 팔리면 그와 같은 주제의 작품을 다시 그렸던 것이지요. 흔히  유화, 템페라, 파스텔, 크레용 4연작으로 알려진 <절규>는 판화까지 합치면 30여 점이나 됩니다. 특별히 그가 아꼈던 작품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또 그리기를 반복하며 자신의 내면을 가다듬었던 것 같습니다. 병약했던 뭉크는 81세까지 살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치유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요?

 

  뭉크가 죽고 난 후 그의 작품들은 전부 오슬로시에 기증되었고, 오슬로시는 뭉크 미술관을 건립했습니다. <절규>는 1994년과 2004년에 두 차례 도난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두 번 다 되찾아 올 수 있었지만 작품의 일부가 손상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2015년 5월 뭉크의 <절규>는 소더비의 경매에서 1억 1990천만 달러(한화 약1358억 원)의 가격에 낙찰되어 당시 세계 최고가를 기록했습니다.  뭉크의 시대보다 불안과 분노, 공포와 광기를 더 느끼는 현대인들이 뭉크의 <절규>를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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