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자장가"라 불리는 포레의 레퀴엠은 죽음을 공포가 아닌 평화와 위로로 표현한 미사곡입니다. 구성, 해석, 작곡 배경 등을 소개합니다.
클래식에서 죽음과 가장 관련 깊은 장르는 '레퀴엠‘입니다. 레퀴엠은 가톨릭에서 '죽은 이를 위한 미사'(위령 미사)에서 연주되는 음악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영혼에 영원한 안식을 주길 바라는 종교 음악이죠. 레퀴엠은 하나의 독립된 곡이 아니라, 가톨릭 미사의 전례(미사)에 따라 여러 기도문(입당송, 자비송 등)을 바탕으로 구성된 복수의 곡으로 이루어집니다. 입당송의 첫 가사가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이기 때문에 전체 미사를 ‘레퀴엠’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가톨릭의 미사(예배)에서 사용되는 기도는 통상문(Ordinary)과 고유문(Proper)이 있습니다. 통상문은 미사 때마다 반복해서 사용되고 내용이 달라지지 않는 기도문입니다. 키리에(Kyrie 자비송), 글로리아(Gloria 대영광송), 크레도(Credo, 신앙고백송), 상투스(Sanctus, 거룩하시도다), 아뉴스 데이(Agnus Dei 하나님의 어린 양) 등입니다. 반면 고유문은 미사 날짜나 축일에 따라 바뀌는 기도문입니다.
일반 미사에서는 통상문이 모두 포함되지만, 위령 미사에서는 성격상 ‘글로리아’와 ‘크레도’는 생략됩니다. 대신 ‘부속가’(Sequentia)가 삽입되어 레퀴엠의 중심을 이룹니다. 부속가는 하나의 긴 시편 구조를 가진 기도문이며, 대표적으로 Dies irae(진노의 날)로 시작하여 여러 단락으로 이어집니다.
부속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Tuba mirum (놀라운 나팔소리),
– Rex tremendae (두려운 왕이시여),
– Recordare (기억하소서),
– Confutatis (저주받은 자들),
– Lacrimosa (눈물의 날) 등.
이들은 각각 별개의 노래처럼 작곡되기도 하지만, 본래는 Dies irae라는 하나의 부속가 안에 포함된 연속적인 절입니다.
미사곡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아래의 글을 참조하세요.
https://www.dasichae.kr/2023/06/missa-for-classic.html
서양음악사 2 : 클래식 음악 이해를 돕는 미사(Missa, Mass) 알아보기 (실제 미사 동영상 포함)
미사가 1500년 동안 중요한 장르로 여기질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작곡된 음악도 미사에 쓰인 가사들이 많은 음악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므로 서양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미사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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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레퀴엠이 심판과 공포를 묘사하는 반면, 포레(Gabriel Fauré, 1845-1924)는 죽음을 고통이 아닌 해방과 안식으로 표현했습니다. 포레는 부속가인 Dies irae(진노의 날)를 생략함으로써 전통적인 레퀴엠에서 나타나는 심판과 공포의 분위기를 제거하고, 부드럽고 평온한 정서를 강조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레퀴엠은 종종 “죽음의 자장가”라고도 불립니다. 레퀴엠 중에서 가장 많이 감상하는 곡이 포레의 곡이고, 죽음과 관계 없이도 종종 애청하는 곡입니다.
평생을 가톨릭 안에서 살았고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던 포레는 가톨릭의 미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의 레퀴엠은 미사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죽음의 해석을 담고 있습니다. 1885년 아버지의 사망과 1887년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작곡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포레는 이 작품이 꼭 특정 비극적인 사건 때문만은 아니며 즐거움을 위해서 썼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레퀴엠은 "산 사람을 위한 위로의 음악"으로 죽음에 대한 평온함과 빛의 이미지를 강조했습니다.

1888년 레퀴엠을 완성한 이후 포레는 2번의 개작을 발표하였고, 자주 포레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5개의 악장으로 소규모 편성인 초판본이 1893년 수정판에서는 일부 악장 추가 및 편성 확대를 하였고, 1900년 최종판에서는 7악장으로 수정되었습니다.
레퀴엠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입당송&자비송(Introit et Kyrie) /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작,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기도
장엄한 오케스트라 도입과 함께 죽은 자의 안식을 기원하는 합창이 이어집니다. 여리고 강해지는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비송으로 넘어가며 “주여, 그리스도여, 자비를 베푸소서”가 반복됩니다.
2. 봉헌송(Offertoire) / 바리톤 솔로와 남성 합창, 죽은 자를 위한 봉헌 기도
여성 저음(콘트랄토)과 테너가 주고받는 선율로 시작되며, 바리톤 솔로가 중심을 이룹니다. 폴리포니적 구성이 돋보이며, 차분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3. 거룩하시도다(Sanctus) / 하프와 바이올린의 맑은 선율, “거룩하시도다” 찬미
하프와 바이올린의 맑은 선율 위에 “거룩하시도다” 찬미가 울려 퍼지며, 더욱 깊은 기도와 숭고함을 표현합니다.
4. 자비로운 주 예수(Pie Jesu) / 소프라노 독창, 자비를 구하는 가장 유명한 악장
이 악장은 오직 소프라노 독창으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절제된 선율과 맑은 음색으로 자비를 간청하는 기도를 전합니다. 하프와 현악의 은은한 반주 위에 맑고 경건한 선율이 울려 퍼지며, 자비를 간청하는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5. 하느님의 어린 양(Agnus Dei) / “평화를 주소서”라는 기도, 장엄하고 부드러운 합창
“평화를 주소서”라는 기도문을 담은 곡으로, 절제된 감정과 서정적인 선율이 조화를 이룹니다. 소프라노 독창과 합창이 어우러져 고요한 분위기를 이끕니다.
6. 저를 구원하소서(Libera Me) / 바리톤 솔로, 심판의 날 언급이 있는 유일한 악장
바리톤 솔로와 합창이 어우러진 중후한 악장입니다. 심판의 날을 묘사하는 장엄한 부분과 평화로운 회복이 극적으로 대조를 이룹니다.
7. 낙원에서(In Paradisum) / 천국으로의 인도, 여성 합창 중심의 맑고 고요한 마무리
여성합창이 천상의 분위기로 시작되며, 고요하고 밝은 음색으로 죽은 자가 천국으로 인도되길 기원합니다. 전체 곡을 부드럽고 평화롭게 마무리합니다.
곡의 구성에서 가장 큰 특징은 가톨릭에서 말하는 죽음에 대한 '심판'과 '두려움'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삭제하고 <낙원에서 In Paradisum>와 같은 희망적이고 평화로운 곡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듯 유려하게 흘러가는 오르간과 현악기의 조심스러운 반주, 그 위에 울려 퍼지는 소프라노의 목소리는 마치 천사의 음성처럼 마음에 평화를 선물합니다. 소프라노의 합창 중간중간 남성 합창이 더해지며 곡은 규모를 키워 갑니다. 화려한 피날레가 아닌 부드럽고 서정적인 선율을 유지하며 곡은 마무리됩니다. 이런 구성은 기존 레퀴엠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기에 발표 초기 이교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기도 했습니다.
총 연주 시간 역시 약 35분으로 모차르트의 레퀴엠(약 55분)과 베르디의 레퀴엠(약 90분) 보다 훨씬 짧은 편입니다. 곡은 극적이고 웅장한 사운드가 아닌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율을 중심으로 차분하게 흘러갑니다. 이러한 특징들이 절제와 간결함을 미덕으로 생각한 그의 작곡 경향을 잘 나타내줍니다.
기존 레퀴엠이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그에 따른 웅장한 음악적 효과에 집중했다면 포레의 레퀴엠은 '성악'적입니다. 소규모의 오케스트라와 오르간을 사용해 성악의 선율을 보다 돋보이게 했습니다. 그의 레퀴엠이 맑고 순수하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사람의 목소리로 표현되는 위로의 선율, 두려웠던 죽음이 레퀴엠을 통해 희망과 위로로 들려오는 순간 우리 마음에는 깊은 울림이 찾아옵니다.
포레의 레퀴엠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이면서, 살아 있는 우리를 위한 음악적 위로입니다. 이 땅에서의 죽음을 맞이한 후 천국에 간다면 아름다운 곳일 것입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감상해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작곡가 포레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는 아래의 글을 읽어보세요.
https://www.dasichae.kr/2025/07/Gabriel-Faure.html
가브리엘 포레의 생애와 음악
프랑스 낭만주의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의 생애와 음악 세계를 정리합니다. 레퀴엠, 꿈꾼 뒤에, 파반느 등 대표작 해설과 함께, 파리 음악원 원장 시절과 사랑 이야기까지 포레의 삶을 깊이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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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하기!
Philippe Herreweghe가 지휘하는 La Chapelle Royale 합창단과 Collegium Vocale Gen의 연주로 마지막 곡인 <In Paradisum>를 감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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