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들라로슈의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 "권력에 휘말린 비극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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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이야기

폴 들라로슈의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 "권력에 휘말린 비극의 여인"

by 다시채 2025.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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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에 욕심이 없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제인 그레이의 안타까운 처형 장면을 묘사한 폴 들라로슈의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프랑스의 화가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 1797~1856)는 역사적인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은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죠.

 

  이 그림 속의 주인공 제인 그레이는 단지 9일 동안 왕위에 오른 뒤 참수형을 당한 비운의 여인입니다. 왜 이런 참수형을 당해야 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당시 영국 왕실의 가족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계도를 준비했습니다. 핵심 인물은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에 등장했던 헨리 8세입니다. 이미지 안에 파란 점은 헨리 8세의 아내들입니다.

2025.02.17 - [미술 이야기] - 초상화의 대가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The Ambassadors>

 

 

  그는 스페인의 공주 캐서린과 결혼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서 태어나 살아남은 아이는 딸 메리 1세뿐이었어요. 아들을 낳아 왕위를 물려주고 싶은 헨리 8세는 교황에게 결혼 무효를 요청했지만,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거부합니다. 그러자 헨리 8세는 영국 성공회를 창설하게 되지요.

 

  그는 캐서린과 이혼한 후, 앤 블린과 재혼하여 딸 엘리자베스 1세를 낳습니다. 그는 앤 블린을 간통죄로 처형을 한 후, 세 번째로 결혼한 제인 시모어와의 사이에서 드디어 에드워드 6세를 낳게 되었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10세에 왕위를 물려받은 에드워드 6세는 16세에 사망하게 되면서 유언을 남깁니다. 왕위를 오촌인 제인 그레이에게 물려준다는 것이었지요. 서열상 메리 1세가 정당한 후계자였지만 그녀는 에드워드 6세와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또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성공회를 증오하는 메리가 왕위에 오르면 성공회가 위축될 것을 염려했던 왕가 실세였던 노섬벌랜드 공작인 존 더들리는 에드워드 6세를 설득해 자신의 며느리인 제인 그레이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장을 작성하게 했던 것이지요.

 

  제인은 왕위에 오르는 것을 거부했지만 부모와 가족들은 그녀를 독방에 가두고 학대하면서 결국 강제로 왕위에 오르게 합니다.

 

 

  이런 과정을 메리의 입장에서는 결코 가만히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왕위 서열 1위라는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군대를 일으켜 제인 그레이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롭니다. 권력을 장악한 메리는 성공회 지지자들 향해 피의 숙정을 단행합니다.

 

  메리는 제인 그레이 만큼은 처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메리 1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대주교를 런던탑으로 보내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처형하지 않겠다는 제안을 전하게 합니다. 하지만 제인 그레이는 순간까지 개종을 거부하고 자신의 종교의 신념을 지킵니다. 이에 감동한 대주교는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겠다고 약속을 하게 되지요.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 246x 297cm,1833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결국 1554212일 런던 탑에서는 사형이 집행됩니다.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은 제인이 참수형을 당하는 마지막 장면을 포착한 작품입니다. 처형은 당시 공개 처형 장소로 악명이 높았던, 런던 탑 앞에 있는 타워힐에서 집행되었으나 왕족의 품위를 지켜주고자 비공개로 진행되었습니다.

 

  들라로슈는 어둡고 칙칙한 공간에서, 제인의 창백한 피부와 순백의 드레스에만 빛을 집중시켜 비극성을 강조합니다. 눈을 가린 채 고급스러운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은 마치 그녀가 무죄하고 고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눈이 가려진 제인은 손으로 무언가를 더듬으며 참수대를 찾고 있네요. 짚더미(피를 흡수하기 위한 용도) 위에 놓인 네모난 나무토막이 보입니다. 이것은 참수용 도마목(Execution block)입니다. 사형수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머리를 참수대에 올려놓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 여인이 참수대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남자는 대주교입니다. 가톨릭 사제의 복장이 아니라 성공회 신부의 복장입니다. 그의 오른편에는 날이 시퍼렇게 선 도끼를 든 사형집행인이 서 있네요.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연민의 정이 느껴집니다.

 

  그림 왼쪽에는 제인의 하녀들이 보이네요. 한 여인은 차마 이 광경을 볼 수 없는 듯, 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벽에 손을 들고 있습니다. 마치 기도를 하는 듯 하네요. 그 앞에 앉아 있는 시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벽에 기대어 허공을 바라보고 있네요. 그녀의 손에는 제인의 목걸이가 놓여 있네요. 목이 잘리는 사형수가 목걸이를 하고 있을 수는 없었겠지요.

 

  기록에 따르면, 제인은 무릎을 꿇고 사람들에게 "오 하나님,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로 시작하는 시편 51편의 미제레레(Miserere)를 낭송하면서 함께 낭송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시편 51편을 암송하였으며, 그녀의 마지막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셨던 말씀과 같은 주여,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부탁하나이다.”였습니다.

 

  제인 그레이는 왕위에 대한 욕심도 없었던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권력의 풍파에 휘말려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들라로슈는 사실적인 묘사와 2.5 x 3미터 크기의 화폭에 담아 마치 눈앞에서 처형이 집행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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