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고야는 궁정화가이자 기록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겨 오늘날 스페인의 귀중한 사료로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의 하나인 <1808년 5월 3일>이란 작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807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군대는 에스파냐 북부와 중부에 위치한 주요 요새를 점령했습니다. 이때 순진하게도 에스파냐인들은 프랑스군이 폭정을 일삼는 에스파냐 왕정을 무너뜨리고, 자기들에게 프랑스혁명 정신을 전해주어 자유를 선사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당시 수석 궁정화가였던 고야도 프랑스의 대혁명을 지지하며 나폴레옹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쳐들어와 저지른 만행을 직접 목격한 에스파냐인들은 1808년 5월 2일 프랑스군에 대한 민중 봉기가 불길처럼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프랑스군은 피도 눈물도 없이 강경하게 진압하여 수많은 시민들이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국 민중 봉기는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다음 날인 5월 3일 저녁 프랑스군은 마드리드 궁으로부터 멀지 않은 프린시페피오 언덕에서 궐기의 주모자와 관련된 자들을 체포하여 즉시 총살형에 처했습니다. 고야는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시쳇더미가 쌓인 마드리드의 거리를 찾아와 지인을 찾으며 다시 한번 비통함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시간이 흘러 6년 후인 1814년 2월 24일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고야(Francisco Jose de Goya y Lucientes, 1746-1828)는 권력을 되찾은 에스파냐의 왕 페르디난도 7세에게 프랑스에 대항한 에스파냐 민중의 영웅적인 모습을 담은 역사적인 순간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으니 보조금을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사실 고야는 돈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애국자라는 평판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고야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탄생한 작품이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입니다. 이 두 작품은 크기가 동일하며 이름에서 통일감을 보여주기 때문에 두 작품은 한 쌍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야는 두 작품을 통해 전쟁 상황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광기와 폭력성과 잔혹함을 담아내었습니다.
에스파냐 독립전쟁의 상장과 같은 그림이 된 <1808년 5월 3일>은 시민들의 처형 순간을 담아낸 작품인데 좁은 공간에서 프랑스 군인과 희생자들이 나란히 마주 보고 있습니다.
땅 위에는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시체가 있습니다. 밤에 시작된 학살은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수백 명의 시민들이 재판도 없이 총살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림의 1/3을 차지하는 어두운 밤하늘은 에스파냐의 암담한 상황을 암시합니다.
총살시킬 시민들을 비취는 커다란 등불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 등불보다 두 손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더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병사들의 총구는 흰 셔츠를 입고 두 팔을 번쩍 들고 있는 남자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남자의 모습과 오른손에는 상처는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연상시킵니다. 죄 없는 예수가 죽임을 당했듯 무고한 시민이 순교자처럼 죽임을 당해야 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남자와 대조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죽음의 공포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공포에 질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거나 주먹을 움켜쥐고 있거나 수도사로 보이는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얀 셔츠를 입고 서 있는 오른쪽에 위치한 사람은 공포감을 느끼며 손 끝을 깨물고 있습니다.
불빛 앞에서 얼굴이 훤히 드러난 사형수들과는 달리 프랑스 군인들은 뒷모습만 보입니다. 총검을 꽂은 총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모습은 한층 공포를 배가시킵니다. 명령에 순종하는 살인 기계가 되어버린 군인들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것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처형장 뒤쪽 어두운 배경 속에는 건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건물이 관청인지 교회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맞다면 고야는 끔찍한 처형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왜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시지 않느냐고 울부짖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상주의 기법이 돋보이는 이 작품이 보여준 화면 구성과 격렬한 감정 표현은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훗날 마네에게 큰 영향을 끼쳐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이 탄생하게 하였으며, <1808년 5월 2일>은 들라크루아에게 영감을 주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외젠 클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란 작품은 아래 포스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dasichae.tistory.com/193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번에는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의 명작 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마 많이 보셨던 익숙한 그림일텐데, 이 그림이 있는 상징적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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