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작품 중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린 <성경이 있는 정물 >이란 작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고흐(Vincent van Gogh, 1853 - 1890)는 목사의 아들로 매우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고흐가 태어나기 1년 전에 사산된 아이의 이름도 빈센트 반 고흐였는데, 이를 알게 된 고흐는 평생 사산된 자를 대신하여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의식에 따라다닌 것 같습니다.
고흐는 자신의 집과 돈을 노숙자에게 베풀면서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신학교에 입학하고자 했으나 그의 극단적인 행동 때문에 교단에서 파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버지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난폭한 개 한 마리 들여놓은 것처럼 무서워하신다... 나는 내 인생에서 의식적으로 개의 길을 기꺼이 선택한다고 말해두마. 나는 개로 남을 테다."라는 기록이 그 단면을 보여줍니다.
188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고흐는 <성경이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Bible>이란 작품을 하루 만에 완성했습니다. 개신교 목사였던 부친 테오도루스의 죽음을 추모하는 작품입니다. 평소 부친이 사용하던 성경책을 가족이 보관 중이었는데, 어머니 안나 코르넬리아가 동생 테오에게 부쳐주라고 하여 고흐가 잠시 맡아 보관 중이었습니다. 고흐는 부친의 성경책을 주목하고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그림을 보면, 테이블 위에는 오른쪽에 불 꺼진 초가 있습니다. 꺼진 초는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 고흐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림 중앙에 펼쳐져 있는 책은 성경입니다. 자세히 보면 책의 오른쪽 상단에 '이사야'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림을 분석한 학자들은 적혀진 성경의 내용은 이사야 53장인데,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고난과 죽음을 당하는 메시아를 예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아버지가 좋아했던 구절이라고도 합니다.
커다란 성경 앞에는 작은 책이 놓여 있습니다. 마치 아버지와 고흐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듯합니다. 고흐가 좋아했던 노란빛이 감도는 에밀 졸라(Emil Zola, 1840 - 1902)의 소설책 <삶의 기쁨>(La Joe de vivre)라는 책인데, 고흐가 사랑한 것입니다. 1888년에 그린 <협죽도가 있는 정물>이란 작품에도 <삶의 기쁨>이란 책이 꽃병 옆에 놓여 있는데, 꽃들이 책을 향해 있습니다.
그런데 고흐의 아버지는 생전에 에밀 졸라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선을 찾는 소설로 신의 존재를 부인한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있는 정물>은 고흐와 아버지의 애증을 보여주거나 부자간의 서로 다른 가치관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해석을 합니다. 고흐가 아버지의 권위적인 종교성을 나타내기 위해 성경을 크게 그리고, 소설책은 작게 그려 상충된 가치관을 표상하였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실제 아버지는 세속 소설을 읽을 가치가 없는 것, 타락한 영혼의 산물로 폄하한 반면, 고흐는 이 소설을 아버지에게 권할 만큼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림 속에서 <삶의 기쁨>의 책자가 덮여 있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아버지의 불편한 심경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책을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주목받고 있다고 합니다. 미술사학자 마우어(Naomi Margolis Maurer)와 에릭슨(Kathleen Erickson)은 두 책에는 같은 흐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찾아냈습니다.
그림 속에 펼쳐진 성경은 그리스도가 희생양으로서 겪게 될 수난을 예고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삶의 기쁨>이란 책에는 타인을 대신하여 희생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 소설의 중심인물은 나자레(Lazare)와 파울린(Pauline)입니다. 나자레가 동료를 경멸하고 무시하는 인물로 묘사되는 반면, 파울린은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배반당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불쌍한 고아 파울린은 라자레가 낳은 아이까지 거두지만 철저하게 이용만 당한 후, 역설적으로 그 가정에 희망이요 등불이 됩니다.
고흐가 성경책과 <삶의 기쁨>을 함께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에서 고흐의 부친은 에밀 졸라를 싫어했다고 언급했습니다. 고흐에게 목사인 아버지는 성경 말씀만 진리로 받아들이는 보수적인 분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반면 고흐는 성경뿐만 아니라 소설에도 기독교 정신을 담아내는 작품도 있기에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고흐는 목사였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성경책을 그려놓으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이 성경과 일맥상통하는 연결고기가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표출한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고흐가 아버지나 성경에 대한 반감을 표출한 것이 아니라 성경뿐만 아니라 소설도 유익하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 고흐는 신앙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신앙적이라고 생각하는 범위가 부자간에 달랐던 것을 보여준 것이지요. 이런 해석이 고흐가 자신을 '개'로 남아 있겠다는 말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참고적으로 고흐의 신앙에 대한 논란이 있는 작품은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고하세요.
https://dasichae.tistory.com/284
<성경이 있는 정물>은 잘 몰랐던 작품인데, 이렇게 그림의 의미를 알고 나니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귀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들로서 제가 아버지와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버지로서 나의 자녀들이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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