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책 읽기 방법은 눈으로 읽는 것입니다. 하지만 옛날 동양이나 서양은 모두 입으로 소리를 내어 책을 읽었습니다. 눈으로만 아니라 입으로 읽는 책 읽기가 중요합니다.
재미있게 읽었던 책중에 하나는 정민 교수의 [책 읽는 소리]라는 책입니다. 책에 조선 초기 성리학자, 한글학자, 역사가, 정치인였던 정인지(1396 - 1478)의 글 읽는 소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인지의 글 읽는 소리에 반한 옆집 처녀가 연모의 정을 품었게 되었던 어느 날 밤 처녀가 담을 넘어 정인지의 방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정인지는 그녀를 타일렀으나 그녀는 소리를 질러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막무가내로 협박을 했습니다. 정인지는 밝은 날 모친에게 말씀드려 정식 혼인의 절차를 밟아 맞이하겠노라는 말로 처녀를 달래어 돌려보냈습니다. 이튿날 그는 어머니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고 이사를 가버렸고, 그 처녀는 상사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선조들의 독서방법은 소리를 내어 읽는 음독이었지, 눈으로만 읽는 묵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당에서 공부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세요. 훈장 선생님 "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를 황"을 말하면, 학생들은 그 말을 따라 반복하는 것이 독서였습니다. 훈장은 좌우로 몸을 흔들고, 학생들은 앞뒤로 흔들며 읽었다고 합니다.
고대 인도의 경전인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 등은 낭송하는 음까지 자세하게 정해져 있었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책을 소리 내어 읽었다는 흔적이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수레 위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습니다. 그러자 빌립이란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사도행전 8장 30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빌립이 내시가 책을 읽는 것을 듣고 그에게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라는 책에는 중세 유럽에서도 책을 소리를 내서 읽였다고 합니다. 유럽인들은 경전을 읽을 때 신성함을 유지하려면 문장의 가락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입을 크게 벌려 소리 내어 읽어야만 책장에 쓰인 죽어 있던 단어들이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올라 의미화된다고 인식했습니다.
18세기 프랑스의 개인 살롱에서는 책을 낭독하고 그것을 감상하는 모습이 흔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통해 '동서고금(東西古今)' 아니 '동서고(東西古)' 즉 옛날 동양이나 서양 모두 책을 읽는 방법은 소리를 내여 읽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에는 소리 내어 독서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으니까 '금'(今)은 뺐습니다.
소리를 내어 책을 읽는 것이 과학적으로도 좋다고 합니다. 눈이라는 하나의 감각을 사용하는 것보다 눈과 입 등 여러 개의 감각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 인간의 뇌를 더 많이 자극하고, 결국 읽은 내용을 더 오랫동안 기억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음악을 들으면 측두엽의 일부인 청각 영역만 활성화하고, 컴퓨터게임을 하면 뇌의 뒷부분이 주로 활성화하는 데 비해 소리 내어 읽을 때는 훨씬 더 광범위한 영역에서 뇌가 활성화한다는 게 뇌 전문가들의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으로 소리를 내어 책을 읽으면서 위에서 언급한 것 외에 유익한 것도 있었습니다. 성격이 좀 급한 편이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빨리 끝내고 다른 것을 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런 급한 마음이 있으면 책 읽기의 몰입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소리를 내어 읽게 되면 이런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 좋았습니다.
반드시 책 읽기가 아니더라도 중요한 메모 같은 것도 소리를 내어 읽으면서 자기 스스로에게 각인을 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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