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는 못 속이는 것일까?" 슈트라우스와 클라이버의 부전자전(父傳子傳)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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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 주는 인생 레슨

"피는 못 속이는 것일까?" 슈트라우스와 클라이버의 부전자전(父傳子傳)의 교훈

by 다시채 2023. 5. 26.

  오랜만에 클래식이 주는 인생교훈에 대한 글을 작성해 봅니다. 본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타고난 재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클래식 음악가중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한 경우가 많지만,  부자 모두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던 슈트라우스 부자와 클라이버 부자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요한 슈트라우스와 요한 슈트라우스 2세 그리고 에리히 클라이버와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사진입니다.
위 : 요한 슈트라우스(좌) 요한 슈트라우스 2세(우) 아래: 에리히 클라이버(좌) 카를로스 클라이버(우)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2세

  요한 슈트라우스 1세(Johann Strauss ,1804-1849)는 지휘대에 서 있을 때나 가정에서도 모두 강압적인 모습을 보인 사람입니다. 슈트라우스는 아내 아나 스튜라임(Anna Streim)과의 사이에서 요한 2세, 오제프, 넬리, 테레즈, 페르디나트, 이두아르트의 자녀가 있습니다. 그의 정신은 온통 음악과 돈벌이에 쏠려 있었고, 가족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철칙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자식을 절대 음악가로 키우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남 요한 2세(Johann Baptist Strauss, 1825-1899)는 아버지 몰래 음악을 배웠는데, 이를 알고 아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을 정도지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슈트라우스가 집을 나가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게 되어 음악을 공부하기 수월하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요한 2세는 음악가로 데뷔를 하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반대하며 아들의 마음을 돌리는데 실패하고 마지못해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나이 19세 1844년 10월에 빈 근교의 히칭에 있는 도마이어 가든 레스토랑에서  대부분 직접 작곡한 왈츠나 폴카 등을 공연했는데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빈의 한 신문은 그의 성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라너여(아버지 슈트라우스의 친구이자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잘 가시오. 아버지 슈트라우스여, 그동안 즐거웠소. 아들 슈트라우스여, 어서 오시오."
 
  요한 2세는 음악가가 되어 지휘를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왈츠를 작곡하여 결론적으로는 아버지와 경쟁하게 되었습니다. 피는 못 속이는 것일까요? 물론 요한 2세는 데뷔 공연에서 마지막 곡으로 아버지의 [로렐리아이의 메아리]로 연주했습니다만.
 

에리히 클라이버와 카를로스 클라이버

  오스트리아 국적의 에리히 클라이버(Erich Kleiber, 1890-1956)는 당시 명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ängler, 1886-1954)에게 필적할 만한 라이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치 정권이 푸르트벵글러를 대놓고 후원하는 등 독일 음악계에 정치적인 회오리바람이 거세지자, 에리히는 이에 회의를 느끼고 유럽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아르헨티나를 새 조국으로 삼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때가 카를로스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습니다.
 
  카를로스(Carlos Kleiber, 1930-2004)는 어린 시절부터 지휘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아버지 에리히는 베를린에서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어야 했기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별도의 음악 공부를 시키지 않았습니다. 나치 정권이 무너지자 에리히 가족은 독일로 돌아왔는데, 카를로스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에 입학하게 되지요.
 
  1953년 카를로스는 아버지 몰래 뮌헨의 3류 극장인 겔트너플라츠(Gärtnerplatz)에서 무급의 연습지휘자 겸 조수로 일하게 되지만, 분노한 아버지는 그를 단 한 번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1954년 포츠담에서는 '카를 켈러'라는 가명을 쓰고 지휘를 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클라이버는 슈투트가르트 극장에서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지휘하며 대성공을 거두고, 1974년 바이로이트 음악제에 초청되어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리데]를 지휘함으로 세계적인 지휘자가 됩니다. 클라이버는 특정 오케스트라나 극장에 소속되지 않고 소수의 음반을 남겼지만 대부분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피는 못 속이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클라이버와 아버지 에리히가 지휘했던 레퍼토리를 살펴보면 겹치는 게 있습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베토벤의 교향곡 7번,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등.... 카를로스는 아버지가 남긴 스코어를 연구하고 아버지의 레퍼토리를 되짚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슈트라우스 부자와 클라이버 부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따라 음악가가 되었다는 것, 둘째, 아들이 아버지와 비슷한 분야의 음악을 추구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아들들이 아버지를 뛰어넘는 위대한 음악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부모님께 닮고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좋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욕하면서 닮은 다는 부정적인 것보다는 좋은 것을 잘 계발하여 부모님 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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