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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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이야기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by 다시채 2024. 5. 6.

 프랑스의 화가 제리코는 메두사호의 난파 사건을 다룬 <메두사호의 뗏목>이란  작품을 통해 새로운 양식의 역사화를 보여주었습니다. 한번 자세히 알아볼까요?


  1819년 파리 살롱전에서 20대의 젊은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가 출품한 <메두사호의 뗏목 The Raft of the Medusa>는 프랑스 사회를 발칵 뒤집어 버렸습니다. 제리코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8개월 동안 생존자들을 수소문해서 직접 체험담을 듣고, 병원을 찾아가 죽어가는 환자를 스케치하고,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시신의 머리와 손과 발을 가져와 부패 과정을 관찰하고, 심지어 모형 뗏목을 만들어 폭풍우 속에 띄우기도 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왕으로 즉위한 루이 18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유럽 각국에 흩어져 있던 프랑스 귀족들을 다시 불러드렸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쇼마레의 백작이 군대를 떠난 지 25년 만에 해군 중령으로 임명되고, 심지어 반대의견을 묵살하고 왕은 식민지인 세네갈에 프랑스인들을 실어 나르던 국영 메두사호(메뒤즈호)의 선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테오도르 제리코의 대표작 &lt;메두사호의 뗏목&gt;을 보여주는 이미지입니다.
<메두사호의 뗏목>  1819년,  491 * 716cm, 루브르 박물관

 

  1816년 프랑스에서 군인과 공무원이 될 사람 등 400여 명을 태우고 세네갈을 향해 출항한 지 2주 만에 메두사호는 모리타니아 해안에서 좌초되었습니다. 신분이 높았던 선장과 장교들과 선원들은 구명정 6척에 도피하고, 나머지 150여 명의 승객들을 임시방편으로 메두사호에서 나온 판자로 뗏목을 만들어 그들을 해안으로 구조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뗏목을 끄는 것이 여의치 않자 귀족들은 밧줄을 끊어버리고 목적지로 떠나 버렸고, 뗏목 위의 사람들을 구하러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길이 20m 폭이 7m에 불과한 뗏목에서 표류하던 150여 명의 사람들은 폭풍우 속에서 공포를 느끼며 기아와 탈수, 자살과 살인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15일이 지난 후 단 15명만이 지나가던 영국 선박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프랑스 왕실은 이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했습니다.

 

  이 사건은 작은 뉴스거리로 넘어갈 뻔하였으나 생존자들은 책을 썼고, 우연히 이 사건을 알게 된 제리코는 화폭에 담아 영원히 남기려고 했습니다. 뗏목 위에서 표류한 지 13일 만에 사람들은 저 멀리에 있는 배 한 척을 발견했습니다. 배가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아 그림을 확대하여 파란 동그라미로 표시해 보았습니다. 배를 발견한 사람들은 깃발을 만들고 배를 향해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조에 동참하지 않고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짓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lt;메두사호의 뗏목&gt;중에서 멀리 있는 배가 잘 보이도록 보여주는 이미지입니다.
작품중에서 멀리 있는 배가 보이도록 한 부분

 

 작품 속의 뗏목은 밧줄이 풀려있어 엉성하게 보입니다. 뗏목의 밧줄이 풀리면서 사람이 바다에 빠지면 다시 이어 붙여 뗏목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특히 가운데 하단의 뗏목의 끝이 파도와 함께 부서져 있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마치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이렇게 극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작품들을 '낭만주의' 미술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포도주 통 2개가 보입니다. 폭풍우로 많은 사람들이 죽자 아비규환이 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술에 취하고 난동을 부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이고 바다에 빠뜨리고 칼로 찌르게 됩니다. 그리고 더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도록 배를 수리하는 도끼 한 자루만 남기고 모든 무기를 바다에 던져버렸다고 합니다.

 

&lt;메두사호의 뗏목&gt;중에서 포도중 통과 도끼를 잘 볼 수 있도록 표시한 이미지입니다.
작품중에서 포도중 통과 도끼를 보여주는 부분

 

  제리코는 뗏목 위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세 개의 삼각형이 구도를 설정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림의 오른쪽 가장 높은 곳에서 손을 흔드는 흑인 소년을 중심으로 하나의 삼각형이 형성됩니다. 그 다음으로는 깃대를 중심으로 큰 삼각형이 만들어집니다. 마지막으로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는 노인의 머리를 중심으로 작은 삼각형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세 개의 삼각형 구도는 사람들의 생존의 버팀목이 되는 뗏목, 희망을 가지고 구조신호를 보내는 사람들, 그리고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무표정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시신을 붙잡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특이합니다.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의 마음일까요? 아니면 생존하기 위해서 인육을 먹어야 하는 고통을 표현하는 것일까요?

 

&lt;메두사호의 뗏목&gt;에 나타난 삼각형 구도를 보여주는 이미지입니다.
<메두사호의 뗏목>의 삼각형 구도

 

  뗏목에서 13일 만에 나타난 배는 안타깝게도 지나버렸습니다. 하지만 이틀 후 완전히 탈진한 상태에서 15일째 배를 만났을 때, 메두사호의 뗏목을 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뗏목 여기저기에는 핏자국이 선명했고, 돛대에는 인육 조각이 매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제리코의 그림을 통해 프랑스 사회가 발칵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고귀한 신분에는 그에 합당한 의무가 따른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던 상류층이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됩니다. 비평가들은 소름 끼치는 주제와 혐오스러운 사실묘사에 광인의 작품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런 반응에 실망한 제리코는 영국으로 건너가 놀라운 성공을 거두게 되지만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제리코의 작품을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윌리엄 터너의  <노예선> 같은 작품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렇게 인간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현실에 관심을 갖고 탐구하는 것을 프랑스에서는 앙가주망(engagement, 참여정신)라고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메두사호의 뗏목에서 구조된 사람이 15명이라고 해서 작품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을 세어보니 14명으로 보입니다. 손을 흔드는 흑인 소년의 엉덩이 부분에 보이는 것이 두건이라면 총 15명의 생존한 사람이 그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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