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적 재능을 꽃 피우지 못한 여성들(파니 멘델스존과 클라라 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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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잡학 사전

음악적 재능을 꽃 피우지 못한 여성들(파니 멘델스존과 클라라 슈만)

by 다시채 2023. 8. 11.

  클래식 음악사 가운데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가졌으나 여성이란 이유 때문에 꽃을 피우지 못한 여성, 파니 멘델스존과 클라라 슈만에 대한 포스팅입니다. 모차르트의 누이 난넬은 고민 끝에 제외했습니다.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나 파니 멘델스존(Fanny Mendelssohn, 1805-1847)은 네 살 위 누나로 음악적 재능이 탁월했습니다. 부유한 멘델스존 가문은 아들과 딸을 교육하는데 열성적이었습니다. 라틴어, 문학, 그림, 피아노 교육을 받았습니다. 13세에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전곡을 암기하여 연주하고, 이탈리아 연주여행 중에는 베토벤, 바흐, 멘델스존의 다양한 곡을 암보로 연주할 정도였습니다. 

  

  프랑스의 작곡가 샤를 구노가 칭찬할 정도로 유능했지만, 보수적인 그녀의 아버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녀의 작품을 출판하는 것과 공개 연주를 금지시켰습니다. 당시 여성에게 음악은 취미활동으로 가능했지만 직업적으로는 불가능했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펠릭스는 자기보다 파니의 피아노 연주가 뛰어남을 인정했으며, 파니는 펠릭스에게 음악적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펠릭스 멘델스존의 작품은 작품 번호가 없는 것까지 포함해도 모두 200곡이 안됩니다. 하지만 파니는 400-500개 곡을 작곡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120개의 피아노 소품, 다수의 가곡, 실내악곡, 칸타타, 오라토리오 등이 포함되어 있다. 가곡 가운데 6곡은 동생 펠릭스의 이름으로 출판되었습니다. 1829년 프로이센의 궁정화가 빌헬름 헨젤(Wilhelm Hensel)과 결혼한 이후 자신의 이름으로 짧은 피아노소품, 가곡, 피아노3중주곡 등을 출판했습니다. 다른 작품들은 대부분 원고 상태로 남아 있다. 작품 경향은 양식적으로는 동생 펠릭스와 유사합니다.

  안타깝게도 파니는 출판한 지 2년 후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동생 펠릭스는 6개월 후 똑같이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파니보다 14년 늦게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 1819-1896)은 직접 음악계에서 활동하며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최초의 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클라라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고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비크(1785-1873)는 당시 유명한 피아노 교사이자 음악 서점 경영자였습니다. 당시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 딸이나 부인이 취미로 피아노를 연주하였지만 클라라는 경우 여성 피아니스트로서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그녀는 일찌감치 천재 피아니스트로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클라라는 9세에 무대에 데뷔했고, 11세에 피아노 독주회를 열였으며, 18세에는 오스트리아 황제가 인정한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들인 쇼팽과 리스트가 클라라의 피아노 연주를 칭찬했다고 합니다. 클라라의 음악적 견해도 존중을 받았는데, 남편인 슈만과 브람스 모두 작곡을 할 때 그녀의 조언과 지도를 구했다고 합니다.

 

파니와 클라라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
파니와 클라라의 모습 (출처:  flypaper.soundfly.com)



  로베르트 슈만이 다른 여자에게 실연당한 후 클라라와 사랑에 빠집니다. 당시 클라라는 파리나 빈으로 연주 여행을 떠날 때마다 큰 명성을 누린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지만, 슈만은 아직 재능을 인정받지 못한 신출내기 음악가에 불과했습니다. 비크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한 이유도 여기서 잦을 수 있습니 다. 비크가 슈만이 피아노를 포기하고 작곡가로 성공할 것을 확신할 수 없었기에 재능이 탁월한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두 사람은 결국 법정 소송까지 가는 다툼 끝에 클라라가 20세가 되던 해안 1840년 결혼을 하게 됩니다. 당시 독일 작센 주의 법은 21세가 되면 부모의 허락없이 결혼할 수 있었는데, 기다리기 보다는 소송했던 것을 볼 때 서로 뜨겁게 사랑했나 봅니다.

 

  두 사람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클라라 슈만은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면서 로베르트 슈만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섬세하고 예민했던 로베르트 슈만은 정신적으로 불안했습니다. 어쩌면  자기보다 유명하고 돈도 많이 버는 아내를 의식했을 수도 있습니다. 

 

  결혼 후 클라라가 남긴 기록을 보면 여성이 작곡가를 꿈꾸면 안 된다는 자기비하적인 표현을 했습니다. 슈만이 피아니스트가 아닌 작곡가로 빠르게 성장하는 데에는 자신의 재능을 포기한 클라라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집 안의 피아노는 한 대라 남편이 피아노를 사용하지 않을 때 사용이 가능했으며, 자녀도 8명(두 명은 세상을 떠났음)이나 낳아  음악에 몰입하겨 어려웠습니다.

 

 

  딸의 형편을 안타깝게 여긴 아버지 비크가 피아노를 한 대 보내주었지만 클라라가 피아니스트로서 활동하는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이제클라라에게 피아노 연주는 생계를 위한 일이었다. 슈만이 세상을 떠나던 날까지도 클라라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클라라는 연주회 프로그램도 직접 만들고, 홍보 활동도 혼자 하고, 아이들까지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1853년 어느 날, 나름대로 음악게 유명인사인 로베르트 슈만에게 한 청년이 찾아왔다. 당시 로베르트 슈만은 43세, 클라라 슈만은 34세, 브람스는 20세였습니다. 로베르트 슈만은 젊은 브람스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으며 브람스는 그를 존경해 자주 그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로베르트 슈만은 클라라 슈만과 브람스 사이를 점점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를 정신적으로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습니다. 

 

  1854년 로베르트 슈만은 강물에 뛰어들어 투신자살을 시도했고, 그 사건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클라라는 음악가로서뿐 아니라 아내로서도 불행했습니다. 결국 슈만은 1856년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클라라의 고된 삶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40년을 더 살며 아이들과 가정을 위해 현신해야 했습니다. 다행인 것은 브람스가 미망인이 된 클라라를 헌신적으로 보살펴주었습니다. 브람스는 다른 여자와 연애하긴 했지만,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다가 1896년 클라라 슈만이 숨을 거두자 이듬해 브람스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가졌음에도 여성이었기에 자신의 재능을 포기해야 했던 파니와 클라라에 대한 이야기는 진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습니다. 파니도 동생 펠릭스처럼 마음껏 음악활동을 했으면 유명한 피아니스트니 작곡가가 되었을까요? 이미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친 클라라가 슈만과의 사랑과 헌신 대신에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펼쳤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랬다면 파니와 클라라의 작품이 지금도 자주 연주되고 있지 않을까요? 뛰어난 재능을 당시 사회적인 관념이나 가정 형편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파니와 클라라에 대한 이야기는 생각할수록 안타까울 뿐입니다. 

 

멘델스존에 대하여 알고 싶으면....

https://www.dasichae.kr/2023/08/Felx%20Mendelssohn.html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사람 멘델스존의 생애와 작품

클래식에 대한 이야기와 감상을 함께 나누기 위한 다시채의 블로그입니다.

www.dasichae.kr

 

슈만에 대하여 알고 싶으면....

https://www.dasichae.kr/2023/08/Robert-Schumann.html

 

슈만의 생애와 작품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평론과 슈베르트 교항곡을 발견하는 등의 여러 업적을 남긴 로베르트 슈만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www.dasicha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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