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음악적 재능을 시기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영화 [아마데우스, Amadeus]로 인해 살리에리의 부정적 이미지는 극에 달하게 됩니다. 과연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시기하고 질투했던 것일까요?
이탈리아 레냐노에서 태어난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부모가 죽자 형과 함께 베네치아에 와서 음악 공부를 하던 그는 16살에 스승 가스만을 만난 뒤 비엔나로 옵니다. 그 후 스승이 죽자 살리에르는 궁정 작곡가가 되고, 1788년에는 음악가로서 당시 최고의 자리인 궁정 악장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러한 살리에르에게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1756-1791)가 나타나자 살리에르가 병적인 시기와 질를 했던 것일까요?
살리에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오랜 시간 계속되어 왔습니다. 모차르트 사후 음악계는 살리에리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민족주의 경향으로 인해 빈 사람들은 오스트리아 태생의 모차르트의 음악을 추앙하고, 이탈리아 출신 살리에리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습니다. 모차르트가 죽을 무렵 살리에리는 이미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가정생활과 제자 양성에만 힘을 쏟았습니다.
사망한 모차르트의 시신에서 독살되었을 때 흔히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모차르트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는데, 그중에 살리에리의 이름도 언급되게 됩니다.
살리에리가 죽고 난 후 1830년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은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라는 단막극을 썼습니다. 푸시킨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소문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푸시킨은 탁월한 문필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두 인물 구도 속에서 인간에게 내재된 질투와 열등감을 과감히 파헤쳤습니다.
1898년에는 러시아 작곡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1844-1908)가 푸시킨의 작품을 대본으로 삼아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오페라를 만들었습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극작가 피터 세퍼(Peter shaffer)의 1979년 희곡 [아마데우스]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살리에리의 이름이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시키는 데는 영화 [아마데우스]가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에서도 각본을 맡았던 세퍼는 희곡보다 더 자극적인 요소를 집어병어 살리에리는 비참할 정도로 왜곡됩니다.
그런데 세퍼의 희곡에 결정적인 영감을 제공한 존재가 바로 푸시킨이었습니다. 천재와 아무리 노력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범재라는 구도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 8개 부문을 휩쓸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워 살리에리에 의한 모차르트 독살설은 더욱 그럴듯한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심지어 ‘살리에리 증후군'(Salieri Syndrom)이라는 심리학 용어까지 만들어졌습니다. 1인자의 뒤를 잇는 2인자가 느끼는 자신의 평범함, 좌절 및 무기력, 질투의 감정으로 생겨나는 심리를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과 달리 살리에르는 모차르트를 시기하여 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살리에리가 남을 시기하고 질투할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황실의 궁정악장이었던 살리에르는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죽기 1년 전까지 30년이 넘도록 오스트리아 궁정악장 직을 유지했습니다. 오페라 흥행과 작곡료 등으로 빈에서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리는 음악가였습니다. 살리에르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리스트(Franz Liszt), 체르니(Karl Czerny) 등을 길러낸 뛰어난 음악교사였을 뿐만 아니라 행정 능력마저 뛰어나 '비엔나 예술가 협회' 회장을 맡는 등 당시 음악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격적으로도 살리에리는 자신의 높은 지위에 걸맞게 온화하고 대인배스러웠습니다. 처세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재능은 있는데 돈이 없는 젊은 음악가들에게는 레슨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슈베르트는 “고마우신 살리에리 선생님께”로 시작되는 수십 통의 편지를 남겼다고 합니다.
반면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연주여행 다녔던 모차르트는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형성할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신동으로 대우해 주는 환경에 익숙해서 그런지 모차르트는 음악 이외에는 미성숙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는 결코 관대하거나 생각이 깊은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작곡가들을 공격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기에, 살리에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음악가들과 사이가 좋았던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살리에리는 실상 모차르트와 협력한 부분도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모차르트는 죽기 전 아들 프란츠 자비에르의 선생으로 살리에리를 선택했습니다. 살리에르를 신뢰하지 않으면 불가능했겠지요.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 초연이 실패하자 "살리에리와 그의 일당이 나를 파괴시키려 공작하고 있다."라는 편지를 지인에게 보냈지만, 살리에리는 [피가로의 결혼]의 재공연을 추진했습니다. 레오폴드 2세의 대관식에도 자신의 작품이 아닌 모차르트의 작품을 연주했습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를 보고 감탄했던 사람도 살리에르였습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탐탁지 않게 여기기는 했으나 음악적인 능력은 인정했던 것이지요.
2015년 체코서 발견된 칸타타 ‘오필리아의 건강을 위하여’(Per la Ricuperata Salute di Offelia)는 모차르트가 사망하기 6년 전인 1785년에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코르네티 등 세 명이 함께 작곡한 성악곡입니다. 라이벌이 아니라 동료 음악가로 함께 활동을 했던 것이지요.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서로 인간적으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서로 협력을 거부할 정도로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천재 모차르트를 살리에르가 시기했다는 살리에르의 극단적 대립구도는 사실이 아닙니다. 살리에리는 클래식 역사상 가장 억울한 오해를 받은 사람입니다. 죽은 살리에르는 너무 억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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